히틀러, 뭇솔리니와 영국 수상 체임벌린 및 프랑스 수상 달라디에가 뮌헨에서 회담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독일에 할양할 것을 결정한 4개국 수뇌 회담을 뮌헨 회담이라고 한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을 행한 히틀러는 다음의 침략 목표를 체코 쪽으로 돌려, 같은 해 9월 체코에 대해 독일계 주민이 많은 수데텐 지방을 할양할 것을 요구했다. 사태의 긴박성에 놀란 영국은 조정을 신청, 체임벌린이 9월 15일 베르히테스가덴에서 또 22일에는 고데스베르크에서 히틀러와 회견하여 평화적 해결을 추구했다.
이어 29~30일의 뮌헨 회담에서 수데텐 지방을 독일에, 또 기타 소수 민족 지역을 폴란드, 헝가리에 할양할 것을 결정했는데 이 양보에 의해 전쟁 위협을 회피한 체임벌린과 달라디에는, 당시 평화의 구제자로서 국민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 해 1939년 3월 히틀러가 협정을 파기하고 슬로바키아를 보호국으로 하였으므로 히틀러에 대한 유화 정책은 전혀 실패라는 것이 명백해 졌다. 결국 뮌헨 회담으로 약간의 시간을 벌었다는 것 밖에는 없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을 행한 히틀러는 다음의 침략 목표를 체코 쪽으로 돌려, 같은 해 9월 체코에 대해 독일계 주민이 많은 수데텐 지방을 할양할 것을 요구했다. 사태의 긴박성에 놀란 영국은 조정을 신청, 체임벌린이 9월 15일 베르히테스가덴에서 또 22일에는 고데스베르크에서 히틀러와 회견하여 평화적 해결을 추구했다.
이어 29~30일의 뮌헨 회담에서 수데텐 지방을 독일에, 또 기타 소수 민족 지역을 폴란드, 헝가리에 할양할 것을 결정했는데 이 양보에 의해 전쟁 위협을 회피한 체임벌린과 달라디에는, 당시 평화의 구제자로서 국민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 해 1939년 3월 히틀러가 협정을 파기하고 슬로바키아를 보호국으로 하였으므로 히틀러에 대한 유화 정책은 전혀 실패라는 것이 명백해 졌다. 결국 뮌헨 회담으로 약간의 시간을 벌었다는 것 밖에는 없다.